[뚜벅이 고궁 기행] 서쪽의 궁궐 경희궁…1623년 준공 당시 명칭은 경덕궁

김영배 기자 승인 2022.08.12 15:23 | 최종 수정 2022.08.14 10:06 의견 0

[워라벨타임스] 왕과 가족,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궁궐(宮闕)이라고 한다. 조선 500년 도읍지 서울에는 경복궁 등 5대 궁궐이 있다. 흔히 고궁이라고 표현하는 조선의 궁궐은 다양한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딸린 정원은 세계적으로도 자랑거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고궁은 시간이 흘러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되새겨보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도심에서 살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재충전할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워라벨타임스 뚜벅이가 조선의 고궁을 뒤따라가본다. [편집자주]

1623년(광해군 15)에 완공된 경희궁(慶熙宮)은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리었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됐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했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사진은 경희궁터. 멀리 보이는 전각이 숭전문이다. ⓒ워라벨타임스

경희궁(慶熙宮)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광화문과 서대문역 사거리 중간 정도로 보면 된다. 경희문 주입구 동쪽으로는 서울역사박물관, 서쪽으로는 서울 강북삼성병원이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서대문역 4거리 일대가 개발돼 업무지구로 환골탈태하면서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 등을 이용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이용하기에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5호선 서대문역이나 광화문역이다.

경희궁은 사적 271호로 지정돼 있으며, 조선후기의 이궁(離宮:왕이 왕궁 밖에서 머물던 별궁. 행궁(行宮)이라고도 함)이었다.

1617년(광해군 9) 착공해 1623년(광해군 15)에 완공됐다. 처음에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리었으나 1760년(영조 36) 경희궁으로 고쳤다.

경희궁 자리는 원래 인조(仁祖)의 아버지인 정원군의 집이 있었는데, 이곳에 왕기(王氣)가 서려다고 해 광해군이 빼앗아 궁궐을 지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경희궁은 도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궐(西闕)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東闕)이라고 불렀던 것과 대비되는 별칭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탄 후 대원군이 중건하기 전까지는 동궐인 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이 되었고, 서궐인 경희궁이 이궁으로 사용됐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했는데, 특히 영조는 치세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융복전(隆福殿)·집경당(集慶堂)·흥정당(興政堂)·회상전(會祥殿)·흥화문(興化門) 등의 여러 부속건물이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경희궁에 있던 건물의 상당수를 옮겨갔으며, 특히 일제가 대한제국을 강점하면서 경희궁은 본격적인 수난을 맞게 된다.

1910년 일본인을 위한 학교인 경성중학교가 들어서면서 숭정전 등 경희궁에 남아있던 중요한 전각들이 대부분 헐려 나갔고, 면적도 절반 정도로 축소되면서 궁궐의 모습을 잃게 된다.

숭정전은 1926년 동국대학교로 이전되고, 2년 후에 흥정당은 광운사(光雲寺)로 이건됐으며, 흥화문은 1832년 박문사(博文寺)의 산문(山門)으로 이축됐다가 장충동 영빈관 정문으로 사용됐다. 황학정은 1922년 사직단(社稷壇) 뒤 등과정(登科亭) 터로 이건됐다.

서울시는 1987부터 경희궁지 발굴을 거쳐 1988년 복원작업에 착수해 흥화문은 장충동 신라호텔에서 이건하고, 숭정전은 새 건물을 지어 복원해 2002년부터 공개하고 있다.

경희궁 흥화문. ⓒ워라벨타임스

◇흥화문(興化門)

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돼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해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복원했다.

경희궁 숭정전. ⓒ워라벨타임스

◇숭정문(崇政門)과 숭정전(崇政殿)
숭정문은 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숭정전은 경희궁의 정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조회를 하거나 궁중 연회, 사신 접대 등 공식 행사가 행해지던 곳이다. 특히 경종과 정조, 헌종 등 세 임금은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일제가 1926년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했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경희궁 자정전. ⓒ워라벨타임스

◇자정전(資政殿)
경희궁의 편전으로 국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거나 경연을 여는 등 공무를 수행하던 곳이다.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왕가의 관을 보관하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1620년(광해군 12) 건립됐으나 일제가 훼손할 때 헐렸다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경희궁 태령전. ⓒ워라벨타임스

◇태령전(泰寧殿)
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魂殿: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다.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 때 같이 매각됐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됐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경희궁 서암. ⓒ워라벨타임스

◇서암(瑞巖)
태령전 뒤편에는 기이한 모양의 바위, 암천(巖泉)으로 불리는 바위 속의 샘이 있어 예로부터 경희궁의 명물이었다고 한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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