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벨타임스] 왕과 가족,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궁궐(宮闕)이라고 한다. 조선 500년 도읍지 서울에는 경복궁 등 5대 궁궐이 있다. 흔히 고궁이라고 표현하는 조선의 궁궐은 다양한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딸린 정원은 세계적으로도 자랑거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고궁은 시간이 흘러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되새겨보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도심에서 살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재충전할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워라벨타임스 뚜벅이가 조선의 고궁을 뒤따라가본다. [편집자주]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대한제국의 황궁이다.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환승역인 시청역 1·2번 출구를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덕숭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는 '서울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관람할 수도 있다. ⓒ워라벨타임스

덕수궁(德壽宮)은 1897년에 선포된 대한제국의 황궁이다. 원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울시청과 마추보고 있다.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환승역인 시청역 1·2번 출구를 이용해 쉽게 접근할 수 있으며, 현재 덕숭궁 정문인 대한문 앞에서는 '서울 왕궁수문장 교대의식'을 관람할 수도 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 등을 거치면서 수난을 당했으며, 궁권터도 대한제국 시절의 3분의 1 이하로 줄었다.

덕수궁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왔을 때(1593년), 월산대군 저택과 그 주변 민가를 여러 채 합하여 '시어소'로 정하고, 행궁으로 삼았던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한 후 1611년 행궁을 경운궁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7년동안 왕궁으로 사용하다가 1615년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이곳은 선왕인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만을 유폐시켰다. 1618년에는 인목대비의 존호를 폐지하고, 경운궁을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기도 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이곳 즉조당에서 즉의하고 창덕궁으로 옮기고 나서는 270년 동안 별궁으로 사용됐다.

1897년 고종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있다가 환궁하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하게 됐는데, 그 때부터 다시 경운궁이라 부르게 되었고 그 규모도 다시 넓혔다. 고종 황제는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후, 왕궁을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도 이곳에 거처했는데, 이 때부터 고종 황제의 장수를 비는 뜻에서 덕수궁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덕수궁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대한문, 중화전, 광명문, 석어당, 준명당, 즉조당, 함녕전, 덕홍전, 석조전 등에 불과하다.

덕수궁은 특히 구한말 비운의 황제 고종이 일제의 압박으로 양위를 강요당하고, 한 많은 여생을 보낸 비운의 궁이기도 하다. 고종이 1919년 1월 22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일제의 독살로 승하하신 것으로 알려지면서 3·1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곳이기도 하다.

덕수궁 대한문. ⓒ워라벨타임스

◇대한문(大漢門)현재 덕수궁의 정문이며, 대한은 '한양이 창대해진다'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고, 궁궐의 동문이었다. 원래 덕숭궁 정문은 남쪽으로 난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환구단 건립 등으로 경운궁의 동쪽이 새로운 도심이 되자 대안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1906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70년 태평로 확장으로 서쪽으로 물러나게 되면서 현재의 위치에 자리 잡게 됐다.

덕수궁 중화전. ⓒ워라벨타임스

◇중화전(中和殿)대한제국(大韓帝國)의 정전으로 조선 제26대 왕 고종(高宗, 1852~1919, 재위 1863∼1907)의 근대 국가 건설에 대한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서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사용하다가 1902년 새로운 정전으로 중화전을 지었다. 본래 2층으로 된 중층 건물이었으나 1904년 4월 화재로 소실된 후 현재의 단층 건물로 중건됐다. 앞뜰에 조회 등의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의 위치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좌우에 있으며, 중화전의 정문으로 중화문이 있다. 특히 중화전은 중화문과 더불어 보물로 지정돼 있다. 정전 안에서 어좌(御座) 바로 위의 닫집을 보면 용을 한 쌍 볼 수 있는데, 이는 정전 천정의 용과 같은 문양으로 덕수궁이 대한제국 황제의 황궁이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덕수궁 중화문. ⓒ워라벨타임스

◇중화문(中和門)1902년 건립된 중화전의 정문으로 1904년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된 후 새로 만들어 세웠으며, 본래 중화문 좌우에 행각이 있었으나 없어지고 동측에 일부만 남아 있다.

◇중명전(重明殿)1897년 황실의 도서와 보물을 보관하는 용도의 황실 도서관으로 1899년 준공됐다. 한성부 건축기사로 초빙된 미국인 다이(J. H. Dye)의 설계로 1층 서양식 건물로 지어졌다. 1901년 11월 화재로 전소돼 이듬해 회랑이 있는 2층 건물로 재건축됐다. 처음에는 수옥헌(漱玉軒)이라 불렸으나, 1906년부터 중명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904년 4월 고종이 이곳으로 이어하면서 편전 겸 폐현 장소로 사용됐으며, 이듬해인 1905년 이곳에서 을사늑약이 체결되기도 했다. 이후 중명전은 외국인클럽 등 민간 영역에서 활용되면서 내외부가 많이 변형됐다. 지금은 실내를 전시장으로 개조해 2010년부터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덕수궁 광명문. ⓒ워라벨타임스

◇광명문(光明門)광명문은 왕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으로 광무 8년(1904)에 큰불이 나서 타 버린 것을 같은 해에 다시 지었다. 1938년 석조전을 미술관으로 개관하면서 정동에 있던 흥천사(興天寺)의 범종과 창덕궁 보루각에 있던 자격루를 지금의 자리로 옮길 때 같이 옮겨 세웠다.

덕수궁 석조전. ⓒ워라벨타임스

◇석조전(石造殿)대한제국때 외국 사신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광무 4년(1900)에 착공해 융희 3년(1909)에 준공한 석조 건물로, 조선왕조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큰 규모의 건물이다. 건물의 외관은 19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정면에 있는 기둥의 윗부분은 이오니아식으로 처리하고 실내는 로코코풍으로 장식했다. 전체는 3층인데 1층은 접견 장소로, 반지하층은 시종인들의 대기 장소로 사용되었고, 2층에는 황제가 거처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됐다.

덕수궁 함녕전. ⓒ워라벨타임스

◇함녕전(咸寧殿)보물로 지정된 함녕전은 1897년 건축됐으며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건물이다. 함녕은 '모두가 평안하다'는 의미이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같은 해에 복원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고종황제는 1919년 1월 21일 이 함녕전에서 돌아가셨다. 그 후 비어 있던 이곳에 당시에 사용하던 가구와 서화, 집기 등을 배치해 100여년 전의 궁중 생활상을 새롭게 재현하였다.

덕수궁 준명당. ⓒ워라벨타임스

◇준명당(浚?堂)이 건물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1904년 화재 때에 소실됐으며,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8월 현판을 걸어 중건했다. 목조 건물로 즉조당과는 복도로 연결됐 있다. 고종께서 신하나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며, 함녕전이 지어지기 전까지 고종의 침전으로 쓰였다고 한다. 이 건물은 높은 기단 위에 세워졌고, 정면 6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지어졌다. 또 좌우 툇간에는 쪽마루가 있다. 1916년 4월에는 덕혜옹주 교육을 위한 유치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덕수궁 즉조당. ⓒ워라벨타임스

◇즉조당(卽?堂)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돼 있는 이 건물은 15대 광해군과 16대 인조가 즉위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1897년 고종의 환궁한 직후 정전으로 이용했으며, 이 때 즉조전은 태극전, 중화전으로 불리다가 1902년 새로운 정전이 세워지면서 다시 즉조당으로 불리게 됐다. 1904년 덕수궁 대화재 때에 소실되었던 즉조당은 그 해에 석어당, 준명당과 함께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했니다. 이 곳은 고종의 후비인 순헌황귀비가 1907년부터 1911년 7월 승하할 때까지 생활하던 공간이기도 하며, 건물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석어당(昔御堂}석어당의 창건 연대는 확실치 않다. 190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같은 해에 건물을 다시 짓고, 1905년 9월 현판을 걸어 완전히 중건했다. 덕수궁의 유일한 중층의 목조 건물로 선조가 임진왜란 중 의주로 피난갔다 환도한 후 거처했던 곳이자 1608년 2월 승하한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광해군이 인목왕후를 유폐하고, 인조반정이 성공한 뒤 광해군의 죄를 문책한 곳이기도 합니다. 특히 석어당은 단청을 하지 않은 '백골집'으로 아래층은 정면 8칸, 측면 4칸이며 위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의 건물입니다.

덕수궁 덕홍전. ⓒ워라벨타임스

◇덕홍전(德弘殿}함녕전을 고종의 침전으로 사용할 때 일반 빈객들을 접견하기 위해 1906년 건립한 후 1911년에 개조한 전각. 주로 황제가 외국 사신이나 대신들을 만나던 접견실로 쓰였다고 한다. 덕홍전 주위에는 행각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행각 일부만 함녕전 남행각에 연접돼 있다.

덕수궁 석조선 서관 ⓒ워라벨타임스

◇석조전 서관(石造殿 西館)1936년 8월 기공해 1938년 6월에 준공됐다. 이왕가 미술관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덕수궁 정관헌. ⓒ워라벨타임스

◇정관헌(靜觀軒)정관헌은 조선 역대 왕의 초상화인 어진을 봉안했던 장소로 1900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전각은 동서양의 양식을 모두 갖춘 건물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동양식이며, 건물은 차양칸과 난간을 서양식처럼 꾸며졌다. 또 난간에는 사슴, 소나무, 당초, 박쥐 등의 전통 문양이 조각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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