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이 고궁기행] 조선의 건축미 뽐내는 창덕궁 전각

김영배 기자 승인 2022.09.15 15:00 의견 0

[워라벨타임스] 왕과 가족, 그리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는 사람들이 사는 곳을 궁궐(宮闕)이라고 한다. 조선 500년 도읍지 서울에는 경복궁 등 5대 궁궐이 있다. 흔히 고궁이라고 표현하는 조선의 궁궐은 다양한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딸린 정원은 세계적으로도 자랑거리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선의 고궁은 시간이 흘러 21세기를 살아가는 후손들에게 역사를 되새겨보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도심에서 살고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재충전할 수 있는 쉼터의 역할을 하고 있기도 하다. 워라벨타임스 뚜벅이가 조선의 고궁을 뒤따라가본다. [편집자주]

창덕궁 부용지. 멀리 보이는 2층 전각이 주합루이다. 주랍루는 왕립도서관 격인 규장각의 서고로 쓰이던 건물이다. 1층이 서고이고 2층은 열람실로 쓰였다고 한다. ⓒ워라벨타임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린 창덕궁(昌德宮)은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소실되고 난 이후에는 사실상 조선왕조의 법궁으로 쓰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선조 40년(1607)에 중건하기 시작해 광해군 5년(1613)에 공사가 끝났으나 인조반정(1623년)때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궁궐전각이 소실됐다가 인조 25년(1647)에 복구됐다.

이후에도 여러 번 화재가 있었는데, 1917년에는 대조전과 희정당 등이 소실됐고, 이를 복원하는 과정에서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강녕전 등의 전각을 옮겨오기도 했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敦化門)

◇돈화문(敦化門)

돈화문은 1412년(태종 12) 건립됐으며, 보물 제383호이다. 돈화(敦化)는 백성을 도탑게(화목하게) 하고 교화시킨다는 뜻이며, 유교경전 사서 중 하나인 중용에서 따온 말이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남서쪽에 세웠다. 2층 누각형 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앞에 넓은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고 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1609년에 재건됐다.

◇금천교(錦川橋)

금천교는 돈화문과 진선문(進善門) 사이를 지나가는 명당수(明堂水)위에 설치돼 있다. 창덕궁의 명당수, 즉 금천(禁川)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려 돈화문 오른쪽까지 와서 궐 밖으로 빠져나가는데, 이 어구(御溝)물가에는 화강석 6∼7단을 가지런하게 쌓은 축대를 설치했고, 여기에 금천교를 설치해 궐내로 들어갈 수 있게 했다. 금천교는 창덕궁이 창건되고 6년 뒤인 태종 11년(1411) 진선문 밖 어구에 설치됐는데, 숱한 화재와 전란에도 불구하고 창건 당시의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현존하는 궁궐 안 돌다리 뿐만 아니라 현재 서울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이다. 궁궐의 위엄을 보여주는 상징적 조각상과 아름다운 문양, 견고하고 장중한 축조 기술 등이 돋보이는 이중 홍예교로서 역사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다.

창덕궁 인정전(仁政展)의 정문인 인정문

◇인정문(仁政門)과 인정전(仁政展)

인정문은 창덕궁의 중심 건물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효종·현종·숙종·영조 등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고 왕위에 올랐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다. 왕위를 이어받는 의식이 거행됐던 곳이며, 정전인 인정전과 함께 조선왕조 궁궐의 위엄과 격식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이다.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正殿)으로 왕의 즉위식과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 접견 등 중요한 국가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朝廷)이 펼쳐져 있고, 뒷쪽으로는 북한산의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2단의 월대 위에 웅장한 중층 궁궐전각으로 세워져 당당해 보이는데, 월대의높이가 낮고 난간도 달지 않아 경복궁의 근정전에 비하면 소박한 모습이다. 인정전은 겉보기에는 2층이지만 실제로는 통층 건물로 화려하고 높은 천장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0년(광해 2)에 재건했고, 1803년(순조 3)에 소실된 것을 이듬해에 복원해 현재에 이른다. 외행각 일원은 1991년 이후에 복원했다.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선정전(宣政殿)

왕이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아침 조정회의와 업무보고, 국정세미나격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창건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세조 7)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 화재로 소실됐다가 1647년(인조 25)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됐다. 주위를 둘러싼 행각들은 비서실과 부속실로 이용됐으나 전체적으로 비좁았다. 뒤편의 희정당으로 편전 기능이 옮겨 가면서 순조 이후에는 이곳을 혼전(魂殿, 종묘로 모시기 전까지 죽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시는 곳)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창덕궁 희정당(熙政堂)

◇희정당(熙政堂)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궁궐전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 2)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원래의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됐다.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20년에 복구하면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옮겨 지은 것이라고 한다.

창덕궁 대조전(大造殿).현재 관람환경 개선 공사가 진행중이다.

◇대조전(大造殿)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흥복헌(興福軒)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를 결정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 경복궁의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됐다. 이건하면서 창덕궁의 상황에 맞추어 재구성했는데,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서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으로 연결했다. 원래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잘 보여 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이다.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했으며, 왕실생활의 마지막 모습이 비교적 잘 보존돼 있다.

창덕궁 성정각(誠正閣) 보춘정(報春亭)

◇성정각(誠正閣)

세자가 거주했던 동궁(東宮)에 속한 전각으로 세자가 학문을 연마했던 곳이다. 희정당 동쪽에 위치하며, 성정이라는 명칭은 공자의 유교 경전인 대학(大學)에 나오는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이라는 말에서 따왔으며 학문을 대하는 정성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뜻한다고 한다. 성정각이라는 현판의 글씨는 정조(正祖)의 어필이라고 전해진다. 성정각의 대문은 높은 솟을 대문이며 영현문(迎賢門)이라고 이름지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건물의 오른쪽에 누마루가 있는데 남쪽에는 보춘정(報春亭)이라는 현판을 달았고 동쪽으로는 희우루(喜雨樓)라고 현판을 달았다. 한때는 이곳을 내의원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우측 맞배지붕의 4칸짜리 전각에는 내의원이었음을 알리는 보호성궁(保護聖躬), 조화어약(調和御藥)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낙선재(樂善齋)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아 1847년(헌종13) 낙선재를, 이듬해에는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 수강재는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 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한다.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낙선재에서는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했다.

◇궐내각사(闕內各司)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중앙의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돼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돼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궁궐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됐다. [참고: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창덕궁관리소, 국가문화유산포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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